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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 보고서

가야금의 우륵과 임진왜란 신립장군의 전몰로 알려진 충주 탄금대를 가보다.

by 키레네00 2020.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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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코로나 시국에 외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자차로만 이동하면서 휴게소나 식당도 들리지 않고 이동하였고, 탄금대같은 곳은 한겨울철에 사람도 없는 까닭에 평일에 아무도 없는 인기없는 산성처럼 슥 다녀왔다. 날이 매우 추웠고, 10m이내로 접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충주 탄금대는 단양, 영월방향에서 내려오는 남한강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달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이렇게 합쳐진 한강물이 여주, 양평 지나서 서울로 들어가게 되는 것. 마치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과 비슷한 그런 환경이다. 

 

충주 자체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등, 워낙 역사가 오래된 고장이기도 하고 남한강과 달천이 모이는 등 자연경관적으로도 굉장히 뺴어난 동네다. 충청도의 충은 이 충주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고 충주 자체가 삼국시대부터 굉장히 큰 고을중 하나였다.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지점에 약간의 구릉이 있는데 탄금대는 거기를 이르는 말. 위 지도에서 탄금대 공원이 있는데 그곳이다. 고 바로 옆은 충주세계무술공원인데 굉장히 부지가 넓다. 실내 건물은 모두 폐쇄되었고, 야외 공원만 일부 개방되어 있는데 마찬가지로 사람이 없이 휑하다. 월요일에 가서 그런지 몰라도. 

탄금대가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곳이라고 해서 이름이 탄금대라지만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고, 물론 정자라든지 시설물도 그때와 연관이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냥 그렇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날이 추워서 전부 들러보지는 못했지만, 봄가을에 오면 경관이 매우 좋을 것 같은 곳이긴 하다. 그렇다 해도 기가막히게 감탄이 나올정도는 아닐거라서 딱히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볼것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이 가야금의 시조로 알려진 우륵과 관련이 있다는 곳, 그리고 임진왜란당시 신립 장군이 북상하는 왜군과 싸우다가 전멸한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들러본 것.

 

탄금대라고 알려진 탄금대 공원은 차로 구릉을 올라가서 주차를 한 다음 산책로를 따라 둘러볼 수 있다. 뒤편에 충주시내쪽으로 개활지를 두고 두 강이 만나는 곳의 산지이므로 산성이 있을법도 한데, 역시 탄금대 토성이 있다. 어디라고 알려진 표식도 없어서 토성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대략적인 윤곽정도는 알겠다.

 

산책로가 이어진 구역이 제법 넓어서 추운 날씨에 돌아보기는 힘들고 하여 1/3정도만 갔다가 돌아왔다. 저 번호들마다 위령탑이나 기념비나 정자같은게 있지만 우륵이나 신립 등과 관련된 전승이 내려오는 곳이지 엄청난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륵이나 신립의 의미를 찾으러 간 경우가 아니라면 조금 실망하고 돌아올 수도 있다. 특히나 지금같은 겨울철엔.. 그덕인지 몰라도 사람은 구경도 하기 힘들었지만. 

 

 

여기가 열두대인가?? 긴가민가 한데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우륵과 가야금에 관하여

탄금대가 그냥 산책로 있는 공원이더라...하면 너무 의미없이 지나가므로 우륵에 관해 한번 정리해보자. 

 

우륵이 가야금의 시조라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금(琴)이라는 악기에 [가야]라는 이름이 붙어 있듯이 그는 가야사람이다. 

 

그런데 가야사람인 우륵이 충주와 관련한 기록과 흔적이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

 

가야는 흔히 연맹국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보면 십수개의 크고작은 나라들로 분립된 지역국가에 가까워 보인다. 시기에 따라서 리더격인 힘있는 나라들이 있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식에 가까웠는데, 

 

초반에는 금관국, 금관가야국이 가장 강성하여 신라와도 국력을 견줄정도였는데, 신라처럼 고대국개로 발전하는 단계에서 경쟁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 땅과 인력은 신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나서 가야나라들 가운데 대가야, 고령가야 이렇게 부른 나라가 가야세력의 주도권을 가지고 성장한 모양이다. 우륵은 이쪽 사람이다. 

 

진흥왕 12년 왕이 순행중에 낭성에 머물러...(중략) 우륵을 특별히 초청하여 연주하게 하였다. 

 

낭성은 오늘날 청주로 알려져 있는 곳인데 낭성면이라는 이름에 그 흔적이남아 있다. 경주에 있어야할 신라 임금이 왜 청주에?? 진흥왕은 당시에 소백산맥을 넘어 적극적으로 영토확장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 앞에 11년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 백제와 고구려가 다투는 틈을 타서 신라가 금현성과 도살성을 모두 빼앗아버린다. 이곳은 백제와 고구려의 접경지역이면서 신라도 예의주시하던 곳인데, 지리적으로는 대략 청주, 증평 일대로 비정할 수 있다. 

 

이떄쯤 신라는 이미 소백산맥을 넘어 충주, 청주 일대를 모두 차지했을 것이다. 그에따라 지방시찰을 좋아하던 진흥왕이 이 일대로 오면서 우륵을 초청했을 것이다. 

 

특별히 초청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멀지 않은 충주에 있던 우륵을 불러다가 연주를 시킨 것이 아닐까 싶은데 정복한 여러 가야민들을 충주로 이주시킨 정책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정복지의 백성들이 단결하는 것을 막고 지역개발을 위해 종종 이주정책을 실시했는데, 가야인 우륵이 멀고 먼 충주에 살게된 경위는 그런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충주가 궁벽한 시골도 아니고 그 이전부터 굉장히 큰 도시였음에는 분명하다.

 

다음해인 13년에 진흥왕은 이때 연주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신라인 계고, 법지, 만덕 3인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신라본기가 아닌 악지에는 대나마 등의 관등을 가진 자들로 언급되고 있어서 상당한 귀족이거나 귀족자제들이었을 것같다. 아마도 이미 음악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보냈을 것이다. 뜬금없이 아무런 재능도 없는 사람을 보내지는 않았을 듯. 관등을 가진 귀족이라는 사실로 봐서 그 시대의 국가 공인된 음악이란 귀족층이나 다루고 배울 수 있는 것이었을게다. 우륵자체도 아마 가야의 상당한 귀족이었을 것이다.

 

진흥왕은 가야음악을 계승할 이들의 학업의 결과물을 듣고 낭성에서 듣던 것과 같다며 치하했다고 한다. 

이후, 국원(충주)는 지속적으로 가야금과 가야음악의 본산이 되었던 듯 하다. 

 

한참 후대인 문무왕 8년, 고구려 원정을 모두 마무리 하고 귀국하던 문무왕이 국원일대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국원의 지방관인 대아찬 용장이 문무왕에게 대접을 한 모양이다. 이때, 나마 관등의 귀족의 아들 능안이라는 자가 가야춤을 공연하였는데, 문무왕이 마음에 들어 포상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가야춤이라는 것은 사실 우륵이 진흥왕이 보낸 계승자 3인에게 각각 가야금, 가야춤, 가야노래를 전승한 것으로 나오는데 사실 이것이 한묶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충주지역에서 가야음악이 지속적으로 계승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쯤 되면, 음악을 하는 것이 중인들이나 천민들이 하던 기술정도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지만, 고대에는 귀족들로 계승하게 하는 등 음악 자체가 중요한 업무이자 중요 국가사업 중 하나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에서 김유신을 비롯한 가야계 인물들이 대거 활동하고 있었고, 문무왕 역시 어머니가 김유신의 누이이므로 가야계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신라왕실에서 가야음악에 대한 대우가 나쁠 이유는 딱히 없었을 것이다. 

 

물론, 김유신 집안은 금관가야 왕실쪽이므로 우륵의 대가야와 무관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륵이 지었다는 12곡의 제목들을 보면 상가라, 하가라 하는 식으로 가야라고 부를 수 있는 상당지역을 아우르는 지명으로 되어 있어서 가야음악이 단지 대가야의 음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우륵은 가야의 여러나라들이 신라와 백제의 압박속에서 하나둘 사라지는 상황속에서 신라로 망명하여 오늘날 충주에 살게되었고, 충주에서 가야음악과 춤과 노래는 상당기간 이어져 내려왔음도 확인했다. 국가지원 하에 우륵은 가야금을 비롯한 가야음악을 전승한 것으로 보인다. 

 

그 흔적으로 남게 된 충주의 탄금대.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이 이름뿐이지만, 가야의 멸망과 신라의 확장정책 와중에 남게 된 한 흔적을 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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