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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 보고서

통일신라시대 9주 5소경에 대한 의문점

by 키레네00 2021.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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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 5소경에 대해 한번 소설을 써보자. 

 

학부생 졸업논문도 고대 교통로에 대해 썼던 걸로 기억이..십수년전에라 기억이 희미하구만.

 

그만큼 고대 교통로나 성곽, 지리적인 개념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아마 대학원에 갔었더라면 성곽을 기초로 하는 연구를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성곽 연구는 필히 산에 올라야 해서 매우 힘들어서 금방 포기했을 수도 있다. 

 

요새는 재미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한번씩 들춰보는 중에 문득 그런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9주 5소경이란 뭔가.

이에 대한 기존의 해설과 설명이 구체적인 타당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관련 논문은 매우 많을 것이지만, 

 

9주는 한주, 삭주, 명주, 상주, 어쩌구...다 못외움. 

 

5소경은 중원경(충주), 북원경(원주),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 금관경(김해)을 말한다.

 

그런데 이 5소경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이 어떻게 되어 있냐면, 

 

 

대체로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설명에는 조금 맹점이 있다. 

 

우선, 수도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사실인데, 지방과 수도의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에 중간 지점에 설치해 놓은 행정적 기능이 큰 목적인 것인가라는 점은 여러가지로 검토를 해봐야될 문제다. 왜냐하면, 수도의 지리적 문제때문에 설치했다고 보기에는 5소경의 위치가 중원경 외에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는게 지도상으로 눈에 띈다. 

우선 잘 보면, 중원, 북원, 서원 이 3개는 너무 가깝다. 충주, 청주, 원주인데, 지리적으로 사실상 옆동네이기 때문에 이 세곳은 수도가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보기는 애매하다.  

 

그나마 충주는 이해가 된다.

충주인 중원지역은 오늘날 서울과 중간지점인데다가, 남한강 수운의 콩게이트같은 곳이므로 군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굉장히 중요한 곳이다. 백제도 이길을 따라왔고, 고구려도 마찬가지고 신라도 마찬가지다. 북방이든, 남방이든 외침이 있었을 때 대부분 지나쳐온 곳이기도 하다. 충주고구려비(중원고구려비)가 있다는 사실 역시 이곳이 주된 남방경략의 한 방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몽골군은 9차의 침입에서 거의 대부분 충주방면으로 왔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도 충주를 거쳐 올라갔다.

 

따라서 일찍부터 충주에 소경이 설치된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바로 옆에 청주나 바로 위에 원주가 소경이 된 것은 좀 이상하지 않냐는 점이지. 

 

게다가 청주나 원주는 삼국시대에서 어딘가의 수도였던 적도 없고, 삼국사기에 자주 등장하던 곳도 아니다.  

 

백제나 고구려의 수도였거나, 중요한 핵심 도시였다면, 오랜 세월 자연적으로 그 지리적인 위치와 교통, 인구, 경제 면에서 모든 부분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중요 도시였을텐데, 그런 도시들이 많을텐데, 그와 상관없는 도시들이 소경으로 선정된 것에 대해 의문이 품어진다.  

 

즉, 사비(부여), 웅진, 한산이나 북한산, 금마저(익산), 신문왕이 수도를 옮기려고 했던 달구벌, 그리고 평양...(평양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엇던 것 같지는 않다.) 또는 고구려 3경중 하나였다던 곳으로 추정되는 황해도 재령. 이런 곳들은 소경이 되지 않았다. 

 

금관경은

그래도 금관가야의 수도였던 곳이고 해상무역을 주도한 세력이 자리잡던 곳이므로 그 지리적인 위상이 충분하다. 그런데 다른 소경에 비하면 경주와 거리가 먼 것은 아니라서 소경이 반드시 위치해야했는지는 애매하다. 오히려 조금 더 급이 높았던 州의 사령관, 장관인 도독이 있는 곳으로 (치소) 해야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참고로 삼국통일 이전에는 대체로 州의 사령관은 軍主라고 하였고, 좀더 후대에는 총관, 도독이라는 중국식 명칭으로 부른 듯 하다. 

 

남원경의 경우

에는 삼국시대에는 잘 언급된 적이 없어서 그 위상이 좀 애매하다. 백제지역에 대한 통치가 사비성이라는 인프라가 잘 갖춰진 도시를 내버려 두고, 그래도 한때 수도였던 공주를 웅주로 삼아 도독을 두기는 했는데, 남원경은 다소 생소하다. 사실, 삼국사기에 전라도 지역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보니 실상이 어떠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남원소경은 통일신라시대의 방리제가 잘 남아있다는 식으로 검색이 되는데, 도시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결과가 잘 정리된건 아직 없는걸로 봐서 대대적인 발굴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보다. 다만, 계획도시로 볼 수 있는 방리제의 격자구획이 확인된다는 점 정도. 그리고 고구려계 유이민들이 많이 이동해간 (물론 신라정부의 주도로) 곳이라는 설명이 많다. 이런 것에 대한 논문을 본것은 아니라서 카더라 정도로 옮겨본다.

 

즉, 결론적으로 중원경 정도를 제외하고는 북원, 서원, 남원, 금관 이 네 소경은 왜 소경이 되었는지, 정말로 수도가 지리적으로 편중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인지는 다소 설명이 좀 부족하다. 행정적으로도 충분한 위상을 갖춘 것인지도 다소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5소경보다 州의 치소가 있던 도시가 더 급이 높은 것처럼 나오기 때문이다. 

대체로 州의 장관인 도독이 직급이 더 높았던 듯하고,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각 주에 소경이 소속된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그것은 소경의 관리가 주 도독의 지휘를 받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소경이 부수도나 왕의 직할지라거나 하는 개념이라면, 9주와는 별도로 서술되어야 할텐데, (경주->5소경->9주 이런식으로..) 각 주에서 州都 다음에 나오는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경들 가운데 몇개는 공통점이 나오는데, 

 

(1) 전부 다른 국가의 영역 안에 있다는 점.

(2) 여러 국가의 소속민들이 혼재된 것이 보인다는 점.

 

 

그런데 몇몇 소경이 가야나 고구려 유민과 관련이 깊다는 것을 생각해봐야된다. 충주는 가야민들이 옮겨간 곳으로 일찍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가야인 우륵이 가야노래와 가야금을 전수한 곳이 충주다. 임나가라인이라고 셀프 소개했던 문장가 강수도 충주 출신이다. 금관경은 원래 금관가야의 수도였으므로 가야인들이 있었을 것이고, 남원경은 고구려계가 이주된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자료를 좀더 찾아봐야될거같다.(관련 논문이 있겠지만 논문까지 찾아보는건 내가 연구자도 아니고..ㅡ.ㅡ)

 

거기에 서원경(청주) 지역에서 통일신라시기 고구려계 유물출토가 확인된다고 한다. 

newsis.com/view/?id=NISX20190117_0000532972

 

충북문화재연구원 "1300년 전 충북 청주에 고구려 유민 강제이주"

【청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1300년 전 충북 청주에 고구려 유민이 강제 이주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www.newsis.com

서원경이라는 도시자체가 서원경 설치 이후부터 고고학적으로 확인된다고 하면 여기서 나오는 고구려 토기 등도 결국에는 고구려인의 이주가 서원경 도시형성의 일부가 되었다는 설정도 가능하겠다. 

 

신라는 정복민들에 자국민들을 더해서 여기저기 옮겨심어놨는데, 특히 충주에 대거 이민정책을 편 것 같다. 충주는 본래 백제땅이었는데, 고구려인이 한동안 지배한 곳이다. 따라서 거기는 백제계주민, 고구려계주민들이 혼재해 잇었을터라, 신라는 지배를 공고히 하고, 백제계나 고구려계 들이 세력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라인들을 포함한 가야인들을 이주시켜 세력의 균형을 꾀한 것 같다. 

 

금관경은 백제나 고구려의 이주민들이 들어간 것은 아니겠지만 내 생각에 가야인들과 더불어 왜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을 것이고 금관가야의 항복 이후에 신라인들이 많이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비슷한 곳으로 금마저가 있는데, 남원경과 관련이 있어보인다.

금마저는 익산지역이다. 거기는 백제가 거의 그 다음 수도쯤으로 개발하던 곳이었고, 고구려의 안승 무리들을 거두어 보덕국으로 만들었던 곳이다. 나중에 반란이 일어나서 폐지된 곳이어서 일종의 이민정책이 실패한 곳쯤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무왕의 서동설화도 있고 초대형 사찰인 미륵사와 백제왕궁이 건립된 곳임을 생각하면 백제의 사비 다음쯤 되는 수도로 개발되던 곳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여기 굳이 익산에다가 고구려인들을 불러모아다 안착시킨 것을 생각해봐야한다. 이건 마치 중원경에 신라인과 가야인들을 이주시킨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일 수 있다 

 

신문왕 4년. 

11, 안승의 조카뻘되는 장군 대문이 금마저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잔적들이 대문의 처형을 보고는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한 채 반역하므로, 왕이 장병들에게 명령하여 이를 토벌하였는데, 이 전투 중에 당주 핍실이 전사하였다.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지방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에 옮겨 살게 하였으며, 그 곳을 금마군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고구려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듯 하고, 그 지방사람이라 함은 금마저 사람들 특히 고구려인들일텐데, 이들을 남쪽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시 심장한 구절이 다음에 이어진다. 

 

신문왕 5년 봄,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를 나누어 청주를 두니, 처음으로 구주가 되었다. 대아찬 복세를 총관으로 삼았다.
3, 남원 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를 사신으로 삼았다. 남원소경을 두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바로 이어서 남원소경이 등장한다. 그래서 아마도 그 직전해에 있었던 금마저 보덕국 고구려인들의 반란과 관련하여 남원경의 성격이 나오는게 아닐까 한다. 마찬가지로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와 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 총관에는 대아찬을 임명하는데, 소경에는 아찬을 임명한다. 이는 분명히 소경이 州보다 행정적, 군사적 위상이 낮은것이다. 물론 100%는 아니다 소경에 대아찬을 임명한 경우도 있는데, 대체적으로는 군주나 주총관이 급이 더 높았던 것처럼 보인다.

 

삼국사기에 보면, 옥보고가 거문고를 남원/지리산에서 연마하였다고 하고 신라에서는 사람을 남원으로 보내 이를 계승하게 했다고 나온다. 옥보고가 고구려 출신이라고 나오지는 않지만, 고구려 왕산악의 거문고에 대한 서술 다음에 바로 옥보고의 거문고관련 기록이 이어져서 나온다. 마치 충주의 가야인 우륵에게서 음악을 배우게 한 장면과 비슷하다 

 

여러가지 정황상 남원은 익산에 안착했던 고구려인들이 옮겨진 곳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고구려인 승려 약사와 법경이 남원과 관련한 인물이라는 소개글이 있는데 출처나 근거가 어딘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게다가 남원은 원래 마한인들이 있었던 곳이고, 후기가야의 대가야의 세력범위가 넘어와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 다음에 백제인들의 영향권아레에 들어갔던 곳인지라 중원경 만큼이나 인적 구성이 복잡한 곳이다. 

 

북원경은 딱히 흔적이 애매한데,

그곳도 고구려계나 말갈계를 모아놓은 곳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백제나 가야계 주민들을 옮겨둔 곳일까..다른 기록이나 고고학적인 자료가 있는지는 검색이 더 필요해 보인다. 

 

소경이라고 해서 전혀 다른 지역의 다른 주민들을 꼭 모셔다가 이주시킨 것인지는 100% 확신하기는 어렵다.

 

대략 이런 이주정책과 관련한 곳이 小京 이라고 "소설"을 써보자면,

일단 기본적으로 소경도 주요도시이므로 신라인 병력과 관리들의 상주와 더불어서 주요 신라인들의 이주와 진출은 꼭 있었다고 가정하고 보면, 

 

중원경 : 백제인-고구려인-신라인-가야인

금관경 : 가야인-신라인-왜인

서원경 : 백제인-고구려인-신라인

남원경 : 마한인-가야인-백제인-신라인-고구려인

북원경 : 백제인-고구려인-말갈인-신라인

 

이런 형태로 다종족 도시로 구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나의 소설이다.)

 

즉, 소경은 수도가 치우쳐 있는 지리적 문제를 위한 행정적 도시라기보다는 본격적인 다종족 이주민 개발도시라고 봐야되지 않을란가.  물론 이렇게 한 이유는 어느 한 집단에 의해 지역이 세력화되어 반신라진영이 되거나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이거나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나가거나 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 가장 클 것인데,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인들이 섞여 있으면 서로 견제나 경쟁이나 좋게는 협력을 통해서 지역의 유력자나 유력집단이 반신라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 가장 커 보인다. 

 

그외 작은 도시나 작은 마을정도는 쉽게 통제가 될 것이지만, 정치적 구심점이 있는 규모가 큰 집단의 경우에는 그대로 뒀다가는 독자적으로 행동을 한다던지 반드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두번째 문제들인데,

여기서 또 소설을 써보자면, 경제적인 목적과 군사적인 목적이 있다고 보인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 1급 귀족들은 당나라에서 죄다 끌고 갔다. 그러고 남아있던 상급 귀족들은 대부분 반신라운동을 전개하다가 투항하거나 복속된 세력들이다 잠재적으로는 언제든지 반신라화 할 수 있는 무력과, 정치력과, 구심점과, 인구수를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는 이런 사람들과 더불어 중간귀족들과 무사계급, 기술자들 등등을 적당히 분배하고 떨어뜨리거나 다른 세력들 사이에 껴넣어 독자행동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나서 두번째 이상의 목적. 도시를 개발하게 하고, 땅을 개척하고, 기술과 물자를 생산하게 하면서 군사력을 제공하게끔 했을 것이다. 

 

나는 그게 9서당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소설이다.)

9서당은 중앙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거기에 고구려인, 보덕국인, 말갈인, 백제인, 백제잔민(百濟殘民爲幢)이 구성원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인과 보덕국인은 어차피 같은 친구들이고, 백제인과 백제잔민도 같은 친구들인데 굳이 따로 구분을 지은것이 특이점이다. 아마 같은 백제더라도 성격이 다른 사람들일 것이다. 마치 고구려인과 보덕국인과 말갈인이 구분되어 있듯. 

 

그래서 생각하건데, 보덕국인으로 만든 2개 부대는 안승과 함께 투항한 병력들, 당연히 금마저출신들로 만들었을 것이고 고구려인과 말갈인 부대는 다른 지역출신들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무왕대 만든 백제인 부대와 백제잔인부대 역시 각기 다른 지역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들 부대는 중앙군이다. 경주지역에서 숙위하게끔 했을 것 같은데 우리는 통일신라시대에 상수리제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종의 볼모나 인질개념인데 각 지역의 주요 병력들이 차출되어 서울에 가 있기 때문에 고구려집단이나 백제집단에서는 별도로 군사력을 보유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가족들끼리 서로 떨어져 있게 하여 서로가 서로의 정치적인 인질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상수리가 무슨 열매이름이 아니라 上守하는 것인데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지방의 유력한 귀족들은 의무적으로 본인이나 자식들이 한번씩 돌아가면서 서울에서 근무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9서당의 백제인, 고구려인, 보덕국인 등등도 결국에는 上守하는 개념으로 귀족이나 유력자 또는 군인집단에서 차출된 인원들이 경주에서 의무복무를 하는 개념이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그러니까 소설을 정리하면,

이 9서당이 5소경과 성립시기가 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성립이 되었고, 앞서 말했듯이 여러 종족들간 견제와 통제를 위해 5소경을 만들었고, 이 5소경을 통해서 인구개발, 토지개발등을 하면서 군사력 충원목적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을 써보는 것이다. 중앙군 확충과 더불어서 고구려나 백제인들의 군사력이 엉뚱한 곳에서 성장하는 것은 방지하고 통제는 수월하게.

 

이게 안된 것이 후대에 장보고의 청해진이 성장하며 반란세력이 된 것이나, 후삼국시대에 접어들어 지방세력이 군벌화 된 것 등이 이런 중앙 통제장치가 여러가지 이유로 고장나게 되어 벌어질 수 있었던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5소경이나 9서당같은게 무슨 민족통합을 위해서라거나 수도가 멀어서 중간 행정적 보완을 위해서라거나 고구려 백제에 대한 안배라거나 이런 개념은 현실적으로는 안맞는 해석이 아닐까?? 그냥 오늘날 현대 단일민족국가, 통일지향적인 관점에서 볼때, 꿰어맞춘 개념일 뿐이고 사실은 철저하게 복속민들이 세력화되지 않게끔, 반신라 세력으로 성장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제도적, 군사적 여러 통제 장치중의 하나는 아니였을까..하고 소설을 써봤다.  

 

물론 관련해서 아마 어딘가 논문이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것은 반드시 누군가도 생각했을 것이므로!! 

 

그리고 다른 잠깐 있었다가 사라진 주나 소경, 이를테면 하슬라가 소경이었다가 주가 되엇다가 한 것들, 잠깐 있었던 州의 성격...그리고 9주의 州가설치되어 군주나 도독이 임명된 최종 지역, 그리고 6정이나 10정. 등 지방군단에 대해서도 그 위치에 대한 타당성, 소경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문제는 많이 있고, 고고학적인 발굴결과가 있으면 그것도 고려해서 생각을 해봐야한다.

 

그쯤되면 머리가 터질수도 있으니 여기서 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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