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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 보고서

신라의 닥돌(1인돌격) 스타일과 살아서 슬픈 월술랑

by 키레네00 2021.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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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굴과 관창

화랑 반굴과 관창은 신라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군을 몰아 탄현을 (대전/옥천/금산 어딘가..) 넘어 황산에서 백제의 계백을 만나 고전할때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5만명이나 되는, 그것도 김유식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가 고작 1/10의 5000명을 쉽게 이기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5만명이 동원된 전쟁사례는 그렇게 많지 않을정도로 대군이긴한데. 백제나 신라 등이 충돌한 사례를 보면 5000명도 적지않은 부대규모라고 할 수 있다.

 

일부 설명에서는 들판 야전에서 진행한 會戰인 것처럼 설명되곤하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10배의 적을 개활지에서 요격할리는 없다. 기습도 아니고....아마도 대군을 맞이하는 방어군 입장에서는 분명히 지리적인 이점을 최대한 살리거나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방어전에 임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서 기록에도 계백이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온다. 

 

계백의 준비로 신라군 5만이 발이 묶이자 김유신은 쫄린다. 왜냐면 당나라군 13만 대군과 날짜 약속을 해놨는데 지금 발이 묶였기 떄문이다. 이게 약속을 못지켜서거나 당나라 소정방한테 혼날까봐가 문제가 아니라 이후 벌어지는 상황에서 주도권을 잃을까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김유신은 극단의 결정을 하게 된다.

김유신이 지시를 했는지 자발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김흠춘(흠순)이 나선다. 이사람은 김유신의 동생이다. 아들 반굴을 독려해서 적진으로 돌격하게 만든다. 이걸 뭐라고 해야될지 모르겠는데, 아마 용어가 있을거 같기도 하고 단기돌격?????

화랑들의 1인 돌격?? 혼자 창 한자루 꼬나들고 적진으로 그대로 닥돌하는거 말이다. 하지만 반굴은 조자룡도 아니고 관우나 장비도 아닌지라 그대로 전사하고 만다. 후대에 반굴의 아들 김영윤도 전장에서 분투하다가 전사했는데 신문왕이 반굴을 함께 언급한다. (반굴과 관창의 솔로 닥돌이 당시 레전드로 남았던 모양이다.)

 

이때 그 유명한관창이 닥돌 릴레이로 나선다. 김품일의 아들이다. 사실, 사서에 정확히 반굴 다음이라고는 안되있기는 한데 서술상의 정황상 그렇게 보고 있다. 두번째 닥돌 주자로 나선 관창.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而彼衆我寡라고 되어 있어서 솔로무대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기는 하지만 그럴수도 있다..정도로 보인다. 희한하게 계백이 무의미한 살생이라고 여겼는지 제갈량의 칠종팔금이라도 찍을려고 했던 모양인지 관창을 놓아주는데, 죽으러 갔는데 살아돌아오면 효과가 안나서 그런지 재차 닥돌하여 결국 목이 베인다. 이에 따라 분개한 신라군이 거세게 몰아붙여서 결국 계백의 방어군을 전멸시켰다는 이야기다. 

 

전투중 [닥돌] 문화.

이 솔로 닥돌은 희한하게 신라에서만 보이는 것 같다. 백제나 고구려에 기록이 적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조카(반굴)을 닥돌시킨 김유신도 사실은 젊어서 1인 돌격 그야말로 단기필마로 적진을 뚫고 다녀오는 솔로 닥돌 경력이 있는데, 김유신의 경우에는 조자룡 못지 않았는지 살아돌아왔다. 낭비성 전투에서 용춘과 아버지 서현을 따라서 출전했는데, 전황이 여의치 않자 제가 나서겠습니다!!라며 김유신이 두어번 닥돌을 하며 적진을 휘젓고 돌아온 모양이다. 아마 닥돌 기록에서 살아돌아온 거의 유일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신라는 이런 솔로 닥돌 기록이 여럿 있는데, 

 

김흠운은 무열왕대 귀족으로서 닥돌 했는데 주변 여럿도 영향을 받아 여러 장수들이 닥돌을 한 모양이다. 왕이 슬퍼하며 닥돌 릴레이를 펼친 4명을 추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게 흔치 않은 사례다보니 기록이 되었을텐데 거기에 주위에서 말리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 신분이 있는데 그러다 죽어봤자 상대편 사기만 올려주고 우리나라에는 손실만 되니 죽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리는데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김흠운은 그대로 닥돌하여 전사하고 만다. 

 

닥돌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취도라는 사람의 3형제는 차례로 중과부적인 적을 상대로 싸우다가 죽어서 열전에 이름이 남았다. 대체로 그런 인물들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한 묶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녕자라는 사람의 닥돌도 있는데, 이 사람도 김유신과 함께 싸우다가 닥돌한 케이스다. 비녕자가 김유신의 권유로 닥돌을 하자 함께 출전한 아들도 아버지가 전사하는 것을 보고 릴레이로 닥돌하려 전사한다. 옆에 있던 종이 원래는 아들만은 말려서 전사를 면하게 하려고 했는데, 그 아들이 말리는 종의 팔을 치고 달려나가 닥돌한 것이다. 이에 종도 두 주인이 모두 전사한 마당에 살아 무엇하랴!!는 자세로 또 닥돌...

 

본인은 물론 조카와 귀족들과 아들들과 종까지 닥돌하게 만드는 김유신 당신은... 

 

죽지못한 원술랑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어떤 전투에서 신라군에 당나라군에 패몰될 위기에 처해 있을 적에, 원술은 닥돌하여 '나도 닥돌 김유신 선생의 아들이다'라고 증명하려고 했으나 주위에서 죽지못하도록 말리는 바람에 살아돌아왔다. 이에 김유신은 살아돌아온 아들을 목을 베라고 조카인 문무왕에게 청했으나 문무왕은 용서했다. 사실 문무왕과 원술은 사촌지간. 이에 김유신은 원술을 집안에서 제명했고, 김유신 사후에 어머니를 찾아갔으나 어머니로부터도 거절당한 그는 이후 매소성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어머니로부터 용서받지 못해 은둔했다고 한다. 

 

왜 이렇게 신라는 귀족 자제들을 닥돌을 시켜야만 했고, 죽지못하고 살아돌아오면 용서하지 못했던 것일까?

 

전쟁이 끊임없던 시기. 신라는 귀족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을 전쟁으로 내몰아야 했다. 어느나라건간에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겠지만, 열세의 상황에서 작은 나라가 백제, 고구려를 치고 당나라까지 상대하려니 보통의 체력과 정신력으로는 안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때 상류 1급 귀족들이 대우만 받는 문화에 젖어있었다면, 제대로 된 전쟁을 수행하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상황들이 계속해서 연출이 될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이것은 김유신이나 왕과 가까운 최상급 귀족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었다. 

 

또한 살아돌아온 아들을 어찌저찌 용서하여 넘어가는 일 없이 김유신 부부는 죽을 때가지 원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알고 있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 귀족들이 목숨을 걸고서 그 역할을 다 하지 않으면 신라는 유지하기 어려운 사회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쳐 목이잘린 피떨어지는 아들의 머리를 들고 있는 아버지의 그 모습을 대중들 앞에 보여야 할 정도로 그만큼 절박한 상황들이 너무도 많았을지도 모른다. 가장 후발주자였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를 상대하면서 어찌어찌 틈과 기회를 만들고 나중에는 당나라와 전면전을 벌일때 찾아온 위기순간만큼은 김유신조차 별다른 전략이 없을 때도 있었다. 

 

신라가 가장 위기에 처한 순간 몇개중 한 순간이었을 텐데, 위기순간에 지도층 내부적으로 큰 분열이나 잡음이 없이 대응에 집중하고 그런 위기에 진골 이하의 귀족들과 평민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골품이 높을 수록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기본적인 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다들 알다시피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아들들간 분열로 당나라에 붙고 싸우고 하다가 왕이 항복하였고, 백제는 사비를 버리고 웅진으로 도망친 의자왕을 예식진이라는 귀족이 붙잡아 소정방에게 갖다바쳤다. 

 

국가의 힘은 병사들의 숫자나 전술적 역량에서도 차이가 나겠지만, 이러한 사회 계층의 내부적 결속과 상류 귀족들의 책임 역시 하나의 주요전력 요소중 하나이다. 통일 후, 신라 역시 그러한 의식이 사라지면서 사회와 계층간 혼란으로 멸망하게 된다. 역사는 돌고돌고 인간은 같은 실수를 계속하는 법이지.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사회는 어디쯤 와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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