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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 보고서

충주의 가야인 강수(强首)선생

by 키레네00 2020.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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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충주 탄금대를 다녀오며

 

충주의 가야인 우륵에 대해서 한번 끄적여 봤었다. 

 

경상도에 있었을 가야인 우륵이 신라에 투항해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당시 신라의 중흥을 이끈 진흥왕을 만나 신라의 국가사업으로 음악을 전승하게 되었고, 이후 무열왕대에도 충주에서 가야음악이 전승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kirene-life.tistory.com/110

 

가야금의 우륵과 임진왜란 신립장군의 전몰로 알려진 충주 탄금대를 가보다.

우선 코로나 시국에 외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자차로만 이동하면서 휴게소나 식당도 들리지 않고 이동하였고, 탄금대같은 곳은 한겨울철에 사람도 없는 까닭에 평일에 아무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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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충주에 있었던 가야사람이 또 있다. 바로 강수 선생이다.

 

강수는 설총,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의 문장가로 알려져 있고, 불교국가인 신라에서 유학을 제대로 배운 가장 최초에 근접한 사람이다. 

 

거기다가 당시 뚫을 수 없었던 철저한 벽이었던 골품제를 넘어서 나름 6두품 귀족이었던 강수는 미천한 신분인 부곡민의 딸과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애결혼을 밀어붙인 것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면, 강수가 신분을 넘어 남녀간의 의리(오늘날 현대적인 표현으로는 사랑이지만)를 지킨 일종의 절개나 지조로 보아 지면을 할애해 기록으로 남긴 것같다. (공식 역사서의 기록이란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남는 것이다.)

 

强首, 中原京沙梁人也. (삼국사기 열전)

"강수는 중원경 사량사람이다." 

 

강수는 6두품귀족으로 보이며 열전에서는 당시 충주인 중원경 사량인으로 나오며 본인을 임나가라 사람으로 무열왕에게 소개했다. 

 

신라 수도인 서라벌에도 사량부가 있는데 중원경에도 사량이 있다고 하니 이게 주요지방마다 있는건지 아니면, 여진족의 8기처럼 서울, 지방 할것 없이 귀족들이 6부체제로 편제되어 있떤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원경(충주) 사람으로 나온다. 

 

이때의 [임나]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나라 역사서에 임나가 나오는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臣本任那加良, 牛頭.”

 

"신은 본래 임나가량 사람이며, 이름은 우두입니다." (본명은 우두, 강수는 무열왕이 지어준 별칭같은 것)

 

임나가량(가라). 우리는 [임나]라는 말이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동원된 사례로 익숙하게 알고 있지만 한국에서도 자체적으로 쓰던 용어임이 확실하다. 물론당연히 일본에서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여기서 말하는 임나가량은 금관가야를 말하는 확률이 매우 높다. 

 

후대의 [진경대사비]에 보면 진경대사를 흥무대왕 즉, 김유신의 일족으로 언급하면서 임나왕족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 역시 대체로 경상도 남부의 가야지역 전반을 지칭하거나 금관가야를 지칭하는 것에 가깝다. 물론 일본의 정치적 영향하에 있었다는 주장은 허구다. 

 

이렇게 충주에 알려진 가야인이 두명이다. 

 

경상도에 있었을 가야인들이 왜 충주에 있게 된 것일까? 그것은 신라가 적극적으로 대외확장에 나서면서 낙동강 일대의 소국들을 병합하였는데, 이때 정복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하는 정책을 쓴 것이 확인된다. 그 가운데에는 금관이나 대가야처럼 제법 큰 나라들도 있었고 작은 나라들도 있었을텐데,

 

이게 애매 모호한 것이 어떤 나라는 가야연맹 소속이고 어떤 나라는 소속이 아니고 그런 구분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오늘날의 표현이 가야연맹이라는 단어를 많이 써서 정의에 조금 혼동이 있을 수 있는데, 00가야, 00가라 하는 식으로 된 나라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전혀 다른 여러 나라이름들이 존재했었다. 이른바 우륵의 12곡에도 상가라, 하가라 등 12개의 지역국가 이름이 나오고, (전부가 국가명인지는 모호하다.) 포상8국이라는 존재도 보이며 그 외에도 수많은 나라들이 나타난다. 

 

대체로 이 나라들이 백제나 신라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면서 가야로 통칭되는 각각의 소국들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나라는 사라졌지만 백성들을 남았는데, 대체로 지역에 영향력이 있는 귀족들과 그 무리들을 여러가지 목적으로 이주시키는 것인데 대체로 충주로 많이 이주를 시킨 것 같다. 

 

왜 충주??

 

당시 충주는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서 맞딱뜨리는 가장 큰 도시이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상당한 규모의 도시였을 것이며 고구려시대에도 중원 고구려비가 남을 정도로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다. 

 

이곳은 군사적, 지리적인 중요성 뿐만 아니라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데 바로 철의 주 생산지라는 점이며, 한강을 끼고 있어서 서울까지 바로 유통망이 이어지는 사실상 내륙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다. 

 

충주를 거쳐 오늘날의 서울인 한산, 북한산군 일대까지 진출하면서 중간 거점으로서 충주는 소경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곳에 인구를 보충하면서 경주가 한쪽에 치우쳐 있는 지리적 단점을 보완하는 거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충주는 본래 백제인, 그 다음 고구려인이 차지했기 때문에 극소수의 신라인 관리나 책임자가 단독으로 통치하기에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신라인들을 포함하여 제3의 가야인들을 두어 적극 정착을 지원하면서 백제인과 고구려인들 사이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균형을 이루며 통치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맞춰서 충주는 말할 것도 없고 여주나 용인 등지 일대에 상당규모의 신라 고분군이 조성이 되는 것도 관리만 파견되는 것이 아니라 통치에 협력할 수 있는 거주집단 자체가 이동해가는 양상을 볼 수 있는데 비슷한 목적이 아닌가 한다. 

 

충주의 누암리 고분군에는 신라고분 230여기가 있다고 하니 상당한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가야인들의 포함여부를 알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충주시청 홈페이지의 설명에 보면 가야계 토기로 볼 수 있는 굽다리접시가 출토되어있다고 하는데 부분적으로 가야의 흔적이 나오는 모양이다. 

 

게다가 신라 삼국통일 전쟁을 수행하는데에 김유신은 물론이고 그 할아버지 김무력과 그 형제들과 그 후손들이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군대를 이끌고 작전을 수행하는데 개인의 역량도 있었겠지만, 상당수의 가야인 귀족들이나 지도층이 이 전쟁이 동원되거나, 이주대상이 되어 충주 뿐만 아니라 여주, 용인, 서울 등지로 곳곳으로 이주해 갔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탄금대에서 시작한 이주 가야인들 찾아보기.

 

탄금대 자체는 그다지 볼 것이 있는건 아니지만 가야인 우륵의 이름이 남은 곳이라는 점에서 한번 정리할 생각이 있었는데, 뒤이어 강수라는 인물에까지 닿았다. 

 

우륵은 대가야, 강수는 임나가라(금관)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가야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시기적으로는 금관가야가 먼저 항복하였지만, 중원경을 차지한 것은 진흥왕대 일일 것이기 때문에 아마 비슷한 시기에 우륵과 강수의 집안이 이주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관가야의 왕족인 김유신이 유년시절을 진천에서 보냈는데, (김유신 탄생지가 진천이다.) 이것은 이주민정책으로 보기보다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그 일대를 통치한 김무력이 김유신의 할아버지이고, 그 아들(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현재 진천인 금물노군 태수였다. 

 

김유신 부모의 결혼과정은 드라마틱하게도 연애결혼인데, 정식 결혼 전에 임신을 하여 야반도주를 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진천으로 도망간 것으로 나온다. 거기에서 태어난 것이 김유신. 그리고 그 어머니는 바로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따님이다. (가야인은 연애결혼을 좋아해??)

 

그런데 현실적으로 생각할 적에 진천군 역시 당시 고구려 땅이었으므로 적의 지역을 차지해 통치하기 위해 단지 김무력과 김서현 일가가 태수나 군주로 임명되어 통치한 것이 아니라 그 세력하에 있는 일정한 가야인들과 신라인들이 동원되어 이주되어 따라갔을 것이다. 

 

이처럼 충주나 남한강 일대로 이주되어 신라의 한강유역 통치에 협력한 가야인들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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