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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보고서

[고대사] 낙랑군에 관한 기록들 1 - 낙랑은 어떻게 요서까지 가게 되었나

by 키레네00 2021.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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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말했다시피 낙랑군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요서에 있다고 주장하는 종류가 가장 많은 듯 하다. (자매품으로 단순 무역중간기지였다라거나, 당초에 설치된적도 없다고 하거나...요서가 아니라 요동이었다거나,, 더 내륙인 현재 중국 보정시였다거나..하는 등의 주장도 본적 있다.)

 

일단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고 치자. 그런 주장의 근거로 쓰이는 것들은 크게 다음 세가지가 있다.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고 언급한 기록들. 

갈석산(장성의 시작점이 낙랑군 수성현이고, 갈석산이 거기에 있다는 기록)

패수(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고 한기록들. 대동강은 서쪽으로 흐르니까 평양이 아니라는 논리.)

 

이 세가지를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단은 이리저리 해석을 꽈배기처럼 꼬아서 이런저런 주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애매한 것들은 제외, 딱히 객관적인 근거없이 조작이라고 치부하는 기록이나 유물들 역시 제외하고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는 것, 객관적인 팩트로 볼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요번 글은 일단은 '기록'위주로 보자. 

 

낙랑군 교치. 낙랑군이 옮겨다닌 것은 사실이다.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낙랑군이 다른 군현들처럼 상황에 따라 계속 옮겨다닌 것을 생략하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록상으로 낙랑뿐만 아니라 현도도 마찬가지고 수차례 옮겨다녔다. 이걸 옮겨서 설치했다고 하는 "교치"라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훗날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설치한 안동도호부라는 것 역시 상황에 따라 이동해간 것을 기록을 통해 알수 있듯이 낙랑도 기록에 이동한 것으로 나온다. 

 

기록대로만 보자면 낙랑은 다음과같은 과정을 통해 옮겨간다. 

 

 

<1> 313년 무렵, 낙랑의 장통이 무리 1000여가를 이끌고 요서의 모용외에게 투항한다.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 遵參軍事.

 

建興원년(313년) 4월(이때 기사에 붙은 여러 인물들의 모용외에게 투항한 기록에 부록처럼 실린 글이기 때문에 꼭 313년이 아닐수도 있다. 그러나 미천왕이 낙랑을 마지막으로 털었다는 삼국사기 기사가 313년, 대방을 털어낸게 314년으로 나오므로 313년으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

 

요동 사람 장통(張統)은 낙랑(樂浪)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해를 이어 서로 공격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낙랑인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해서 그 백성 1000여 가구를 통솔해서 모용외(慕容)에게 귀부하니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해서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자치통감 진기(晋紀)10

 

삼국사기에도 313년 이후로는 고구려가 낙랑과 싸운 기록은 등장하지 않는다. 

 

(참고로 장통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등장하는데 모용외에 의탁한 뒤에 모용외의 수하로 등장한다. 아마도 같은 인물인듯 싶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자치통감의 같은 대목을 인용, 요약한 듯)

미천왕 20년.....我將<如孥>據于<河城>, <>遣將軍<張統>掩擊擒之, 俘其衆千餘家, 歸于<棘城>. 王數遣兵寇<遼東>, <慕容廆><慕容翰><慕容仁>, 伐之, 王求盟, <><>乃還.

 

참고로 장통이 모용외에 의탁하여 새로 설치된 낙랑군은 통설대로 요서로 보는게 합리적으로 보인다. 미천왕이나 그 다음의 고국원왕이나 그 이후에도 요동지역을 상당히 잠식해 들어가면서 모용씨와 대를 이어 요동일대에서 치고박고 하는데 낙랑은 등장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대까지도 요동을 전부 차지했지만 낙랑은 등장하지 않는다. 

 

<2> 432년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들을 유주로 이동시키고 북평군에 조선현을 두다. 

      (432년에 조선현사람을 '비여'로 옮겨 다시 설치하였다.-위서-)

 

<3> 520년대 북위가 영주에 낙랑군을 두다. 

 

<4> 537년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된다.

 

 

장통이 모용외에 투항하고 이후에 고구려가 낙랑군과 접촉한 사실이 없으므로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이후의 낙랑관련 기록은 전부 교치된 낙랑이 중국왕조 정책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지고있다. 

 

위 사이사이에도 뭔가 의미있는 낙랑 관련 기록들이 있는것 같지만 주요내용상 이정도로만. 

 

<2> 432년에 북위에 의해 사민된 낙랑군 백성들이 북평군 조선현으로 옮겨가는데 (낙랑이라는 이름은 이때는 없어지고) 이 북평군 조선현이 "비여"라는 지역이며 이곳이 갈석산이고, 창려이고, 진장성이 시작되는 곳이고 하는 등등 오해의 시작이라고 본다. 

 

한때 뉴스에도 나왔던 낙랑 조선현사람 한현도의 무덤이 북경인근에서 발굴되었다고 한 것도 이 때의 행정조치가 영향을 주었다고 보인다. 참고로 한현도는 539년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북위시대.  (당시 뉴스에도 낙랑이 그럼 북경인근에 있었던걸까??라는 식으로 나왔지만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503201582887881

 

1500년 전 베이징에 살던 한민족 무덤 발견?

베이징시 다싱구 싼허좡(三合庄)촌 일대 고대 무덤군 발굴 현장 /2015-03-20(한국일보)베이징시 다싱구 싼허좡(三合庄)촌 일대 고대 무덤군 발굴 현장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1,500년전 원적(原籍)이

www.hankookilbo.com

 

이 뉴스기사에서는 교치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역사인식이 없는 사람이 기사를 쓰면 이렇게 된다. 

 

대체로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내용을 보면 대체로 <2> 북위에 의해 사민, 교치된 낙랑군의 위치(북경인근)와 대략 일치하는 주장을 하기 떄문이다. 즉, 낙랑이 요서에 있는 것으로 지목된 기록들은 대체로 432년 이후의 기록으로 보면 된다. 

 

그럼 낙랑이 요동이나 요서에 있는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겠지? 그걸가지고 줄기차게 주장을 하는데 그런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다음 글에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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