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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보고서

[고대사] 낙랑군 위치에 관한 기록2 - 요동이나 요서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

by 키레네00 2021.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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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글에서 낙랑군이 313년(혹은 그 전에) 미천왕에 의해 밀려나 장통이 모용외에게 투항하여 다시 낙랑군이 설치되고 장통이 모용외로부터 낙랑태수가 되었다고 살펴보았다. 그 이후로는 고구려도 낙랑과 접촉한 사실이없고,  중국의 사정에 따라 여러차례 행정조치가 있었다. 이걸 교치라고 한다. 

 

[아무말 보고서] - [고대사] 낙랑군에 관한 기록들 1 - 낙랑은 어떻게 요서까지 가게 되었나

 

[고대사] 낙랑군에 관한 기록들 1 - 낙랑은 어떻게 요서까지 가게 되었나

앞선 글에서 말했다시피 낙랑군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요서에 있다고 주장하는 종류가 가장 많은 듯 하다. (자매품으로 단순 무역중간기지였다라거나, 당초

kirene-life.tistory.com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거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물론 그들도 터무니없는 말로 우기지는 않는다. 나름 기록이 있다. 그래서 낙랑 위치의 3가치 키워드로 언급한 것들 가운데 위치를 직간접적으로 찍은?? 기록들을 먼저 보자. (패수와 갈석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후한서 본기 / 열전

樂浪人王調據郡不服<01>遣樂浪太守王遵擊之郡吏殺調降

<01>樂浪故朝鮮國也在遼東

 

대략, 낙랑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과정에서 새로 낙랑태수를 보내서 평정했다는 얘기. 거기에 달린 "주석"에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라고 되어 있다.  

 

열전에 이런 구절도 있다. 본문에 붙은 주석. 

 

長岑屬樂浪郡其地在遼東

장잠현은 낙랑군 소속이고 그 땅은 요동에 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위치를 정한다고?? 와씨 이정도 나오면 낙랑군 위치는 게임 끝난거 아니야? 라고 할 법도 하다. 신선하다. 그런데 본문이 아니고 주석으로 달린 말인데, 이게 후한서 자체주석인지 차후에 누가 추가한 주석인지는 확인이 안되지만,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의아함을 느낀다. 

 

왜 요서가 아니라 요동에 있다고 할까?

 

낙랑을 요서에 있다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당시의 요동은 현재 요서였다고 주장한다. 즉, 한나라 당시의 요동은 난하 동쪽을 말하는 것이라는 건데... 실제로 요동이 확장되어 요하 동쪽을 의미하는 것은 후대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요동과 요하 모두 이름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요동은 현재의 요서라는 주장. 

 

지명이 행정적으로나 자연적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데에는 동의한다. 같은 이름도 여러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의 문제는 '낙랑=요서'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요동의 위치도 바꾸는 주장을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어지지 않은 점이 있다.

 

"요동"이라는 말이 두가지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한가지는 행정구역으로서 요동군이 있고, 다른 한가지는 넓은 의미의 지역성을 의미하는 요동이란 말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영동지방이라고 하면 대강 정확하지는 않아도 어디를 말하는지는 다 안다. 영남이나 호남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게 행정구역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만주나 간도라는 말 역시 정확히 어디부터 어디까지라는 정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요동에 있다"라고 할 적에는 요동군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요하동쪽, 극동지역 어딘가..라는 뜻이다. 요동군이라는 행정구역안에 낙랑군이라는 행정구역이 있다고 말하진 못할테니까. 

 

다시 보자.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이 말이 낙랑군이 요동군이라는 행정구역안에 군안에 군이 또 있다는 말은 아니지않겠나?? 중국인들이 요동이라고 부르는 중국의 극동지역 전체를 말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고구려를 지칭할때 요동이라는 말이 쓰였고, 고구려도 서신을 중국에 보내 셀프 인트로듀싱할 때 "요동의 아무개"라고 했던 것이다. 이 때 요동은 요동군을 말하는게 아니라 동쪽의 중국 밖을 아울러 말하는 것 그 이상은 아니다.

 

따라서 저 주석에 달린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라는 말은 오히려 한반도 북부에 낙랑이 있었다 하더라도 딱히 틀린말은 아니다.

 

강릉시는 영동에 있다. 

상주시는 영남에 있다.

 

이런말과 똑같을 뿐이다. 

 

 

원래는 요서가 요동이었다??

그래서 혹자는 난하동쪽의 요서땅이 원래는 당초의 요동이었으니 현재의 요서를 말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낙랑/조선은 요동[군]에 있었다고 픽스해놓으면 현재의 요서와의 연관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니까 원래는 요동이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었다가 나중에 옮겨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행정구역이 옮겨가는 교치라는 것도 있었고, 지명이나 강물 이름이 바뀔수는 있다. 

 

그런데 행정구역같은 경우는 옮겨가 경위가 거의 명확한편이고 기록도 남은 편이다. 몇년도에 누가 어디를 옮겨서 설치했다든지, 어디랑 합쳤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봐야할 점이 있다. 

 

중국은 동쪽으로 영역이 확장되면서 새로 [군]을 설치해 나가기 시작했다. 연나라 효왕은 상곡, 우북평 등지와 함께 요서군, 요동군을 설치했다. 

 

그리고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해에 낙랑, 진번, 임둔, 다음해에 현도를 설치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점령지가 생기고 통치와 행정이 들어가면 "새로" 군을 설치했지 기존의 행정구역 군이 옮겨와서 차지한 명확한 사례가 딱히 안보인단 얘기다. 밀려나서 후퇴할적에만 옮겨 설치한 기록들이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교치라고 하지 영역이 확장될때 기존 군현이 확장방향을 따라 이동해가는 사례가 들어본적이 없다.

 

뭐 찾다보면 있을수도 있지만 낙랑만 보면, 중국이 진출하면서 요동을 1클릭씩 밀어내기로 동쪽으로 이동한다면, 현재의 요서->요동->낙랑지역으로 요동군이 계속 이동했어야 하지만 그런 흔적은 없다. 

 

따라서 요동군이 언제 더 동쪽으로 옮겨졌는지에 대해 명확한 근거나 기록을 제시할 수 없으면 그냥 가능성정도로 열어두는 것이 최선일 수 있겠다. 

 

 

요동군 험독과 왕검성의 연관성에 대해 

 

단, 왕검성을 계속 요동군 험독현과 연관짓는 주석이나 말들이 많은편인데 이 부분은 따로 다뤄야될 수도 있겠다. 일단은, 당연히 요동군 험독현에 위만의 도읍 왕검성이 위치할 수 없다. 요둥군 험독현이라는 행정구역이 있는데, 다른나라 조선의 수도가 같이 있을 수는 없는거니까. 

 

그러면 자연스러웠어!! 라고 말할려면, 위만의 왕검성을 점령하고 그 자리에 요동군 험독현을 설치했다고 하면 말이 될 수 있지만, 조선을 점령하고 세운 것은 낙랑군이지 험독현이 아니다. 그러므로 애시당초 낙랑군은 험독현과 무관해진다. 

 

그러면, 과거 옛날에 조선이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공격에 밀려나기 전에 도읍하던 곳이 요동군 험독현이었을까?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역시나 조선이 연나라에게 밀려나기 전에 위치했던 곳이어야 하므로 역시나 조선이 멸망한 자리에 세운 낙랑군이나 왕검성과는 무관해진다. 험독현을 조선의 옛 수도였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낙랑군이나 위만의 왕검성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것이 된다. 그냥 낙랑군과 무관하게 먼옛날 수도였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정도 

 

이래저래 험독현은 낙랑군과는 무관해진다. 

낙랑이 모용외에게 투항한 313년 이전의 기록에서 요서의 낙랑을 찾을 수 있을까?

 

다른 글에서 언급한대로 313년 이후의 기록은 요서내륙으로 이동한 후의 낙랑을 말한다. 고구려 미천왕과 치고박던 장통 및 낙랑인들은 요서의 모용외에게 의탁하기로 하고 무리를 이끌고 넘어갔다. 이 때, 육로로 갔는지 해로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넘어간 낙랑인들은 그 이후에도 여러 정치적인 격변을 거치면서 소속과 위치가 바뀐다. 

 

(참고로 평양에서 육로로는 갈 수 있을리가 없다든지, 당연히 요동에서 육로를 통해 1클리크 밀려난것이라든지 하는 주장도 있지만, 근거나 자료없는 단정은 지양하자. 그런 근거없는 단정은 위험하다. 이를테면, "세종대왕이 천재도 아니고 혼자서 한글을 창조했을리가 없잖아. "라는 근거 없는 단정때문에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연구했다고 교육이 이뤄졌었지만, 세종은 천재가 맞고 집현전에서는 반포직전까지 한글창제를 알지 못했으며 또한 한글창제를 반대했다.)

 

그럼 내가 말하는 그 객관적이 근거! 313년 이전의 기록에서 낙랑이 명확하게 요서에 있었다!! 뚜둔!! 할 수 있는 기록이 있으면..

 

나도 보고싶다....

 

낙랑이 이렇고 저렇고 위치 어쩌고 한 기록들은 대체로 역사서의 본문이 아니라 후~대에 첨부한 후대의 주석서가 대부분이다. 

 

사기색은, 정의, 등등 수백년 뒤에 붙은 주석들은 그 주석이 붙은 시점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지 사기나 한서가 서술하고 있는 당대의 인식이 반영된 것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한참 후대에 누가 주석을 붙이고 그 주석에 또 누가 주석을 붙이고 하면서 네가 맞네 저게 맞네 하다보니까 혼란이 가중된다. 

 

 

그 외에는 패수,갈석산 등의 간접적인 위치추정의 단서들로 이뤄진 주장

 

명확하게 낙랑의 위치를 지목한 기록들에 대해서 살펴봤지만 역시나 요서에 있었다고 명확하게 언급한 것들, 그 중에서 신뢰도가 있는 것들은 없었다. 반박하기 힘든 기록, 특히 313년 이전의 명확한 위치관련 기록 그런게 있어야 되는데 딱히 없었다.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네 서쪽으로 흐른다네 하는 기록들과 갈석산이 여기있네 저기있네 하는 기록들을 가지고 낙랑은 역시 요서에 있었쒀!!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다음번엔 그런 기록들을 한버 살펴보자. 

 

(굳이 이런 글쓰기가 큰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잠깐씩 들어서 현타가온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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