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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보고서

[고대사] 낙랑군 위치에 관한 글4 - 낙랑과 관련한 패수를 둘러싼 논쟁

by 키레네00 2021.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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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의 위치에 관한 논의 가운데에서 가장 난이도 있는 챕터다. 

 

패수에 관한 부분이다. 

 

우선 패수를 언급하기전에 지난 글에서 언급된 항목들을 생각해보자. 좀길다. 하지만 정리가 필요해보인다. 건너뛰려면 스크롤을 좀 내리면 패수부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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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글에서)

 

낙랑이(또는 그 소속 현이) 요동에 있다는 주석들이 존재하는데 낙랑이 평양에 있어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했다. 낙랑군이 요동군 경내에 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기 떄문이다. 이미 郡이 있는 곳에 郡이 있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요동이 요동군이면서 낙랑군이라고 하면 이상하잖은가. 낙랑군 소속의 현이 요동郡에 있다는 말 역시 성립될 수 없잖은가. 

 

따라서 이 때의 요동은 행정구역상의 요동이 아니라 관념적 개념의 요동이다. 고구려는 요동에 있다는 말이나.  고구려 왕이 스스로 요동의 아무개라고 한 것 역시 郡으로서의 요동을 말하는게 아니다. 더군다나 이 말은 요서에 있다는 주장과도 상충되며 현재 보정시 수정현에 있었다는 저쪽 주장과도 정면으로 대치된다. 그리고 한서 지리지에 요동군은 낙양에서 3600리, 낙랑군은 5000리로 나온다. 따라서 "요동에 있다.."라고 하는 말은 요동군이라는 행정구역상 개념으로 말한게 아니다. 

 

그리고 낙랑은 313년에 모용외에게 무리 1000여家를 이끌고 투항했다. 삼국사기에서 313년 이후로 고구려와 낙랑의 접촉기록은 전무하고 이후로는 형식적으로 중국의 책봉명칭에 간간이 등장할뿐이다.  때문에 1차적인 낙랑의 소멸은 이때로 보는게 맞다. 다만 기록상 313년의 기록에 부록처림 실린 장통의 투항기록의 특성상 313년보다 약간 앞선 사건일수는 있다. 

 

그런데 중국측 사서에서 낙랑군은 이후로도 행정구역으로 계속 등장한다. 모용외는 그를 위해 그가 이끌고 온 무리들을 포함해서 낙랑군을 설치하고 그들을 이끌고 온 "장통"을 태수로 임명한다. 즉, 교군, 교치한 것이 기록상 깔끔하게 확인이 된다. 

 

313년 이후로도 낙랑군은 소속을 달리하거나 통폐합되는 과정이 기록이 남아있다. 따라서 313년 이후의 낙랑은 조선본토에 설치된 낙랑군과는 위치상으로는 전혀 무관해진다.

 

432년에 낙랑군 백성들을 유주 북평군에 조선현을 두고 이주시켰다. 이때의 조선현 백성들이 모용외가 설치한 낙랑군의 주민들이라고 봐야되는게 합리적이다. 이 조선현 역시 모용외가 설치한 낙랑군과 위치상으론 무관해진다. 갈석이나 진라자 장성이 언급되는건 이때쯤부터로 보인다 

 

533년에는 영주지역이 함몰되어 남영주를 새로 설치하면서 낙랑, 요동 등등 5개군을 통째로 옮겨와 교군/교치했다고 나온다. 여기선 아예 교치했다고 당당히?? 적혀있다. 당연히 북평군 조선현과도 무관한 지역이고, 그 이전 모용외가 설치한 낙랑도 무관한 지역이다. 당연히 조선본토에 처음 새운 313년 이전의 낙랑과도 전혀 무관한 지역이다. 이때 남영주가 옛날 전국시대 무수현일대라고 하는데 수나라때 들어서 이를 수성현으로 이름을 고친다. 

 

그렇다..수나라가 6세기에 옛 무수&남영주를 고쳐만든 수성현을 낙랑군 수성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낙랑이 여기에, 조선이 여기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또 힘을 실어준게 "내가 태강지리지에서 봤는데.."라면서 달린 주석들이다. 거기에는 [갈석=낙랑군 수성현=진나라 장성이 시작된 곳] 이라는 유명한 등식을 남긴다.

 

하지만 원천적으로 갈석산은 우선 남영주(무수/수성현/현재 보정시)와는 무관하다. 그러다보니까 이쪽에서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영주 지역에서 갈석산을 하나 만드는데 현재의 백석산을 갈석산으로 만든다. 물론 갈석산이 백석산이라는 근거는 없다. 

 

옛날 기록을 남긴 사람들도 혼동이 왔는지 갈석을 두개로 만든다. 좌갈석, 우갈석. 그 중의 하나는 고구려 경내에 있다고 써놨다. 물론 삼국사기 등 우리측 사서에는 전혀 등장 안한다.게나다 진나라 장성은 요동까지 쌓았다고 사마천의 사기에 적혀 있다. 그럼 요동에 갈석이 있는가?? 물론 아니다. 즉, 갈석=진장성이 시작된 곳이라는 등식 자체가 정의내리기가 굉장히 애매해진다. 장성이 전국시대에 이미 연나라나 조나라 등이 세운 장성들이 곳곳에 있었을 것이므로 장성이 있다고 다 진나라가 쌓은건 아니다. 게다가 갈석산은 진시황이 방문까지 했다고 하던데 당시엔 조선이 존재했으니까 진시황이 조선땅안으로 들어갔다는 이상한 말이 되버린다. 게다가 저들의 주장상으로는 연나라 서남쪽에 갈석산이 있게되는건데 조선이 연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껴있는 이상한 결과가 된다.

 

그리고 낙랑군 수성현에(당시에는 조선이었을) 진나라가 들어와서 장성을 쌓았다는게 합리적이진 않다. 이런 부분들이 논리적으로, 또는 근거를 갖춘 객관성을 확보하고 점검이 되는게 아니라 그냥 냅다 물어뜯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 긴 서론이지만 정리하자면, 

진장성=낙랑군 수성현이라는 등식 등등은 여러차례 교군, 교치를 겪으면서 지리정보가 짬뽕된 것에 가깝다.  진나라가 낙랑군(당시 조선)에 들어와 장성을 쌓았다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몽염은 임조에서 요동까지 쌓았다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원래 이글에서 다루고자 했던 패수를 언급해야되는데. 

 

하아....패수는 좀 복잡하다. 

 

우선 조선이 멸망당하는 한무제의 공격관련한 기사에서부터 패수가 등장하는데 한나라와 조선 왕검성 사이에 패수가 등장한다. 사기에 나타나는 패수는 국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사기 내에서도 패수, 패하가 계속 등장한다는 점이며,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도 패수는 평양을 지나는 강물로 나온다는 점이다. 

 

따라서 패수가 고유명사로서 특정 강물을 정확히 지칭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습수 열수 이런것들도 계속 등장하지만 위치를 특정하기가 쉽지는 않다. 

 

낙랑이 저쪽 중국내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그르니까 일단 평양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자기들끼리도 낙랑의 위치가 다 다른데 의견통일좀 해줬으면...)쪽에서는 수경의 기록을 일단 팩트로 전제한다. 

 

[수경]의 기록이다. (수경주(注)가 아님.)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 入於海

 

(보통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패수가 낙랑군 누방현을 나와서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현재 평양 대동강은 서쪽이나 서남쪽으로 흐르기 떄문에 절대로 낙랑군은 평양에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오!! 그럴싸해!! 패수가 낙랑군을 흘러가는데 동쪽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역시!! 대동강은 될 수 없어!

 

그런데, 여기에 주석을 달은 수경주(注)를 지은 역도원은 여기에 의문을 품고 다른 기록을 남긴다. 아니다 싶었는지 마침내 북위에 고구려 사신와 와있어서 고구려 사신한테 물어본 모양이다. 

 

당시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구려인 사신은 다음과같이 답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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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地今高句麗之國治,(그땅은 지금 고구려의 국치(수도=평양)이다. // 이 앞에 나온 이야기는 대략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시켰다는 내용이므로 여기서 그 땅은 조선&낙랑을 말한다. )

 

余訪番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

 

내가 번사(고구려 사신)을 찾아가니 말하기를 성(평양성, 앞에서 말한 고구려 국치.)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 

(陽은 강북을 말한다.) 그 물이 서류해서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나고 --즉 낙랑군치 한무제가 설치했다.-- 서북으로 흘러간다.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고로 지리지에서 말하기를(한서 지리지)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역도원 판단에는 수경 원문이 좀 이상한거같고 고구려 사신말 들어보니까 한서 지리지가 맞는거 같다...라고 서술하고 있는것이다. 이 판단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이건 역도원이 이래저래 생각해보니 이런거같다..라는 얘기고 그가 당시 고구려인의 말을 인용했다는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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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일단 당시 실제 고구려인 관료로부터 들은 말이니 당시의 고구려인의 지리 인식에 가장 가까운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을 만난시점은 500년대 초반쯤일거같은데 대략 문자명왕대로 보이는데 고구려로 치면 이때는 586년 에 평양 장안성으로 천도하기 이전이기 떄문에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국치는 대성산성과 안학궁 셋트인 평양이다.

 

 

지도에 표시한 대성산성과 안학궁을 중심으로 놓고 생각하면 강의 북쪽에 있는것도 맞고 서쪽으로 흐른다는 대략적인 방향성도 맞다. 강의 흐름상 조선현은 안학궁보다 서쪽에 있다는 식으로 언급했는데, 낙랑토성 등 평양낙랑유적지가 지도상 거의 좌하단 끄트머리에 있으므로 고구려 사신의 말이 딱히 틀린점은 없게 된다. 

 

다만 그 다음에 서북으로 흐른다는 말이 걸리는데 저쪽편에선 요걸물어서 역도원이 구라를 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원래대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완만하게 돌아서 남쪽으로 흐른다음에  남포시쪽에서 크게 서북쪽으로 확 꺾어돌아서서 바다로 나가는데 완만하게 돌아 남쪽으로 흐르는 구간은 생략이 되고 서북으로 확 꺾어 나가는 부분이 아마 꽤 특징적인 부분이므로 단편적으로는 그렇게 기술된거같다. 그렇다고 이걸두고 아주 완전히 썡뚱맞게 동쪽으로 흐른다거나 하지는 않았으므로 큰틀에서 틀리진 않다고 본다.  게다가 1500년전에는 저 지점부터 넓은 만이나 바다였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서해안쪽 해안선이 더 깊이 들어왔던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관련자료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고..여튼 고구려인이 굳이 서북이라고 말한 것은 그지점이 특징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반대편에 선 사람들이 뺵뺵 거리면서 인정못한다고 하면 어쩔수 없지만 몇줄에 불과한 기록이지만 당대에 평양성 일대와 낙랑 관련해서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남긴 것은 유례가 없다. 더군다나 혼자 그렇다더라 하고 기록을 남긴것도 아니고 평양에서 온 고구려인을 만나서 직접 들은 얘기지 않은가. 

 

게다가 저기 언급된대로 한서 지리지에서는 낙랑군 패수현 부분에서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각각이 말하는 패수를 한번 나눠볼 필요는 있다. 

 

이렇게되면,  보다시피 기록들이 완전히 서로 상반되게 되는데,  우리는 여기서 구분이 필요하다. 

 

역도원이 말하는 고구려 사신에게서 들었다고 하는 패수는 6세기의 패수이며, 고구려 국치, 수도를 지나는 패수다.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평양과 관련한 패수는 대체로 같은걸 말한다. (물론 백제와의 관계에서 등장하는 것도 있다.)

 

사기 조선열전에서 말하는 패수는 거의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선이고 접경지대로 나온다. 왕검성은 패수 동쪽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이때를 염두하고 말하는 것이므로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 우거왕떄의 패수와 6세기 고구려 사신이 말한 패수는 분명히 다를 수 있다. 여러 정황상 같은 강물을 놓고 말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제는 한서 지리지의 패수인데, 여기서는 패수현부분에서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나간다고 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저쪽편에 선 사람들은 과감히 신박한 한자 해석을 시전하는데 

 

西至增地縣을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가 통상적인 해석이라면, 

 

증지현 서쪽에 이르러...라는 드립을 시전한다. 그르니까 물은 동쪽으로 흐른게 맞고, 증지현 서쪽에 이르러 바다로 나간다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해석하려면

 

西至增地縣(원문) 요게 아니라 

水至增地縣西 

요렇게 써야 맞는 것 아니겠나,. 저 해석은 너무 억지라서 수용하기어렵다. 

 

그렇게 따지면 수경의 기록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것 아닌가?

浿水出樂浪郡鏤方縣 / 東南過臨浿縣 / 入於海

 

요걸 다음과 같이 띄우고 어거지로 해석을 해보면 전혀 다른 말이 된다. 

 

浿水出樂浪郡鏤方縣東南 / 過臨浿縣東 / 入於海

패수가 누방현 동남쪽에서 나와서 임패현동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이렇게 해석하는게 맞다고 주장한다고 치자. 차라리 이런 해석은 가능성이라도 있지  증지현서쪽 드립은 너무 어거지 주장이다. 이렇게 잘라서 해석해버리면 강물이 서쪽으로 가는지 동쪽으로 가는지 안나오고 경유하는 지명만 언급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게 아니라 한서지리지의 해석을 어이없이 바꾸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여기까지 쓰고 있으니 현타온다...ㅡ.ㅡ

 

좀더 소설을 써볼까?

 

여기서 기록 하나를 추가해보자. 

 

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鏤方縣在郡東, 蓋出其縣南逕鏤方也

 

패수현은 낙랑 동북에 있고, 누방현은 군 동쪽에 있댄다. 

 

마지막 구절이 좀 애매하긴한데(대략 그현-패수현-남쪽을 나와서 누방현을 지나간다..???)

 

대략 위치만 보면 이렇다. 

 

 

대충 이런식을 위치시키면 (물론 정답은 알수 없다.) 얼추 맞는다. 대동강의 큰 지류 하나가 남강인데 요것도 패수로 볼 수도 있다. 누방현 동남에서 나와서 임패현 동쪽을 지나(過) 바다로 나간다는 수경의 원문과도 다르지 않고 ㅎㅎㅎ 역도원이 들은 고구려 국치가 강북에 있고 서로 흘러 조선현을 지나 막판에 서북으로 꺾어나간다는 말도 다르지 않고 ㅎㅎㅎ 한서 지리지에서 말한 증지에서 바다로 나간다는 말도 맞게 된다.

 

한서지리지에서는 패수현에서 나온 패수(본류)는 서쪽으로 흘러 증지에서 바다로 나가고

수경에서는 (내가 어거지로 해석하자면)  패수는 누방현 동남쪽에서 나와서 (여기서는 대동강지류) 임패현 동쪽을 지나서(過臨浿縣) 바다로 들어간다.(入於海)

다. 

수경주에서는 고구려 도성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옛 조선현을 지나서 서북으로 꺽어 나간다. 

십삼주지에서는 패수현은 낙랑군의 동북쪽에, 누방현은 동쪽에 있다. (패수현)남쪽에서 나와서 누방현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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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함 보자

십삼주지대로라면 낙랑 동북과 동쪽에 패수현과 누방현이 있다. 그러면 조선현은 이들보다는 서쪽에 있는게 맞다. 방향이 중심점을 조선현으로 두고서 동북과 동쪽이라고 했다는게 가장 합리적이다.

 

그리고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여기에서 나온 임패현과 증지현은 동북과 동쪽에 있었다던 패수현과 누방현보다 더~~ 동쪽에 있었단 얘기가 된다.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출발지인 패수현, 누방현보다 종착점인 임패현과 증지현은 더 동쪽이어야 말이 된다. 

 

그렇게 되면 조선현은 패수 출발점인 패수현과 누방현의 서남쪽, 서쪽에 있었을 것이므로 조선현은 패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역이 되버린다. 

 

그러면, 고구려 사신이 말한 패수가 국치를 지나, 조선현을 지나간다는 말과도 전혀 안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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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위에서 내가 수경 원문 끊어읽기를 바꿔본것은 하도 저쪽편에서 더 말도안되는 해석드립을 치니까 나도 한번 해본거고 통상적인 해석을 놓고 생각해보면, 

 

[A]수경원문과, VS [B] 수경주&한서. 

 

이 둘중에서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릴 수밖에 없다. 방향이 완전 반대로 해석하니까.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대로 수경주의 고구려인의 말은  5~6세기의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이므로 수경 원문의 패수와, 사기의 패수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수경원문도 맞고, 수경주 고구려 사신의 말도 맞다고 전제하면, 당시 고구려의 패수와 수경원문의 패수는 다르다고 할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서는 훨씬 이전에 쓰여진 기록이고 본문 자체의 주석이지 후대의 주석이 아니므로 더 오리지날에 가깝다. 

 

수경은 한나라때 쓰여졌다고도 하고 진(晋)시대 곽박이지었다고도 한다. 사실상 저자 불명이기 때문에 반드시 한나라대의 오리지날 낙랑의 상황을 반영했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곽박이 낙랑이 축출된 이후 요서에 교치된 상황을 서술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용외가 장통의 낙랑무리를 받아 다시 낙랑군을 설치할 적에 소속 현에 누방현, 패수현, 임패현 이런것들이 그대로 설치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가장 오리지날 원조 낙랑에 가까운 기록은 한서 지리지다. 한서를 지은 반고는 AD 1세기 사람이다. 무려 거의 2000년전 사람인데, 

 

게다가 한서 지리지에 보면 낙랑의 패수에 대한 언급만 있는게 아니다. 

 

낙랑군

 

含資, 帶水西至帶方入海.

함자현(含資縣),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대방현(帶方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패수현 부분에서 패수에 대한 언급이 나왔듯이 함자현 부분에서 대수를 언급하는 것은 함자현이 대수 출발지인듯 하다. 대방현 부분에선 언급이 없다.)

 

呑列,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탄열현(吞列縣), 분려산(分黎山)이 있는데 열수(列水)가 나오는 곳이다.  서쪽으로 점선현(黏蟬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며 820리를 흐른다

 

 

낙랑군에 있는 강물에 대한 서술.패수, 대수, 열수는 모두 서쪽으로 향한다. 

 

따라서 한서 지리지에서 보이는 패수가 서쪽으로 흐른다는 말은 대수와 열수에 대한 설명에서도 보이듯이 한서 지리지는 방향성에 상당한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한서에서 언급하는 패수, 1세기경의 패수는 서쪽으로 흐른게 맞다고 봐야될거같다. 

 

반면에 수경 원문은 출발지와 종착지가 구체적이라서 내가 그 해석을 비틀은 것처럼 보면 한서 지리지와 같은 강일 수도 있고, 다른 강을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기 열전에 나온 패수도 같을 것일 수도 있고, 다른것일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싶은 말은 아주 후대에 흐리멍텅하게 오락가락하는 주석기록들 말고 오래된 당대의 기록위주로 놓고 봤을적에

 

명확하게 어떤 기록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데 하나를 버릴려면 확실한 근거나 논증이 있어야되는데 불구하고 한쪽을 그냥 무시하거나 틀렸다고 하거나 말도안되는 소리로넘어가고 반대로 이상한 기록들을 별다른 논증없이 팩트로 전제하고 다른 것들을 껴맞추려 하면 안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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