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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보고서

[고대사] 낙랑의 위치에 대한 기록3 <낙랑군 수성현=갈석산=진장성 시작점?> 과연 맞는가.

by 키레네00 2021.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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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석산 진장성 어쩌구 하는것들을 알아보기전에 

 

앞서 다른 글들에서 생각해본 바를 잠깐 정리해보자. 

 

일본이 낙랑을 조작한 것이라면 굳이 평양을 끌어와 조작해서 얻는 바가 무엇일까??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조선지배의 당위성과도 무관하고 진출명분을 생각하면 낙랑이 되려 요서에 있는게 만주진출을 하려는 일본에게는 더 낫다는 생각이다. 

 

타율성론에 의해 역사적 열등감을 심어주기 위해??? 그런데 애시당초 고려, 조선 이래 평양에 단군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왔고, 조선/낙랑이 평양에 이었다고 받아들여왔는데 새삼스럽게 뭘?? 전혀 데미지가 없다. 

 

그리고 낙랑은 요동에 있다는 식의 기록들은 평양에 낙랑이 있어도 쓸 수 있는 말이다. 정확하게 [요동군]이라는 제한적인 행정구역을 의미한다면 군(郡)안에 군을 설치할 수 없기  때문에 요동에 있다는 말은 우리말로 영동지역, 영남지역 이런말과 비슷한 개념이다. 생각을 해봐라 요동군이 따로 있고 요동군 밖에 조선이 있었다. 조선을 점령하고 낙랑 등등을 세웠는데 요동 안에 낙랑이 있을리가 없잖은가. 저기서 말하는 요동은 요하 동쪽의 극동지역 일대라는 관념적인 지역을 통털어 말하는 것이지 행정적 구역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따라서 낙랑이 서북한에 있었다 하더라도 저 말은 틀린 표현은 아니다. 

 

되려 낙랑이 요동에 있다는 말은 다른 기록들과 상충되어 낙랑이 요서나 다른 더 깊숙한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과 반대되는 말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기록들도 비슷한 개념으로 보며 말이 안되는 주장이 많다. 

 

갈석산이 진나라 장성 시작점이고 여기가 낙랑이다??

[갈석=낙랑=장성] 이 등식을 별다른 점검없이 진실값이라고 설정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들의 오류는 시작붙 나온다. 

 

진나라가 장성을 쌓은 곳이 낙랑이 될 수 있겠나? 진나라가 장성을 쌓을 때에는 조선이 아직 있었고, 그럼 진나라가 조선땅에 들어가서 장성을 쌓았다는 소리가 되는데 여기부터가 잘못된 상황이다. 

 

그럼 조선을 몰아내고 그 땅에 장성을 쌓은걸까? 상황은 그럴싸 해보이지만 그래도 장성과 낙랑은 무관해진다. 그땅에서 몰아냈다고 가정하면 밀려난 땅에서 좀 버티다가 한나라 무제 때 멸망하고 낙랑이 세워졌을건데 장성자리하곤 낙랑하곤 당연히 다른 지역이 되는게 합리적이다. 

 

남의 나라 땅에 버젓이 장성을 쌓을 수 있다고 소리를 아무런 논증도 없이 그냥 넘어가는게 일종의 수법이랄까. 

 

그렇게 찾아낸 곳이 현재 더 내륙인 보정시 일대인데 하필이면 거기 수성현이라는 곳이 있었고, 거기엔 장성유적지가 있다곤 한다. 그런데 명확한 갈석산은 없다보니 거기에 글자 하나 다른 백석산이라는 곳을 찍어서 갈석산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물론. 딱히 직접적인 근거는 없다. 

 

기록같은걸 여기저기서 줏어와서 조합해가면서 연나라가 남쪽을 안문과 갈석의 이익을 취했다느니 하는 식의 기록들을 근거로 내세우는데 그게 벽석산이 갈석산이라는 근거는 아니잖은가. 그냥 생각이지. 

 

그리고 기록상으로도 보정시에 있었다던 수성현은 낙랑군 수성현이 아니다. 

 

이쪽 수성현은 연나라때 [무수현]이라고 여러 기록에서 언급되고 있다. (통전 등등) 조나라와 싸워 뺏고 뺏기던 곳 어쩌구 되있는데 생각을 해보자. 연나라 조나라 경계에 있던 땅에 낙랑이 있을 이유가 뭐가 있냐..그럼 연나라 조나라 사이에 조선이 있었단 얘기로구나??

 

연나라 무수현이라고 버젓이나와도 낙랑군 수성현이라고 빡빡 한치의 의심도 없이 우기는것은 상당히 후대의 기록들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遂城廢縣 : (安肅)縣西二十五里戰國時燕之武遂也  폐지된 수성현은...전국시대 연나라의 [무수]이다. 

연나라 무수가 어떻게 낙랑의 수성이 되겠나..쯧..

 

요 무수현의 연혁을 쭉 읊어놓은 기록들이 있는데 한나라때 중산국이었다가 탁군에 소속되었고, 뭐 이런식이다. 

 

여기에 낙랑이 잠깐 등장하는데, 

 

營州陷。(영주가 함락되어..)

永熙二年置南營州於此,(남영주를 여기에 설치하고)

領昌黎遼東建德營丘樂浪 五郡,(낙랑 등 5군을 속하게 했다.)

僑郡(모두 교군이다. 모두 교치한 군이다.)

...

隋開皇初廢南營州。(수나라 때 남영주를 폐지하고)

三年並廢昌黎郡十八年改置"遂城縣"屬易州唐因之。(수성현으로 고쳤다. 당나라 때도 그대로 따랐다.)

대체로 여러 기록들에서 이런 연혁을 따라간다.

 

자...어후..현타온다. 

 

원래 좀더 위에 있던 영주가 박살나서 533년에 무수현에다가 남영주를 설치하고 요동 낙랑 등의 5군을 정확히 "교군"했다고 되있다. 영주를 잃어서 백성들을 옮겨와서 교치했다는 뜻이다. 

 

이게 6세기다. 그리고 수나라때 남영주를 폐지하고 수성현으로 고쳤다. 즉 그땅이 수성현으로 불리기 시작한건 수나라때부터다. 

 

런데 무슨 진나라 장성을 낙랑에 쌓은 드립을 여기다가 갖다 붙일까. 

 

313년에 낙랑군이 미천왕에 의해 쫓겨나 모용외에 의해 1차로 교치된 이후에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나 백제가 더이상 낙랑과 접촉한 사실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여기저기 소속되다가 요동 등등과 우르르 더 내륙으로 교치되었다가 폐지된 것이다. 

 

수성현은 당나라때부터 부른 것이라는 기록자체도 깔끔하고 명확하다. 

 

즉, 보정시의 수성현(수나라때부터) 여기는 진나라때나 조선이나 낙랑과는 사실상 무관한 곳이다. 

 

그런데 이걸 무시하고 이사람들이 계속 주장하는 이유는?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史記』, 「夏本紀」, 주석

 

사기라고 되있지만 사마천이 이 말을 쓴게 아니라 후대에 주석으로 붙은 말이다. 내가 태강지리지에서 봤는데..라는 글이다.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고 하드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이후로 요런 주석을 그대로 답습한게 꽤 된다. 

 

여기서 갈석=낙랑군 수성현이라고 언급했다고 내가 봤다고 하는 사람들이 기록을 남기는 바람에 연속적으로 여러 혼동이 생긴다. 

 

주로 6~8세기 기록들이 문제인데, 당시 지리적 개념에는 갈석산이 오늘날의 친황다오 부근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기들이 볼때 이게 친황다오 갈석산은 아닌것같은게지.. 아니 진시황도 갈석산에 방문했었다는데 그럼 여기가 조선땅이라는거여 아님 진나라 땅이라는거여 뭐여. 이상하잖은가. 그러다보니 당나라때쯤 되면 갈석산을 두개로 만들어버리네? 그래 갈석산이 사실은 두개였던 거야!! 라고 말이다.

 

그래서 고구려 경내에도 갈석산이 있다고 또 기록을 남긴다. (낙랑은 고구려가 점령한거니까.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는 갈석산은 고구려에 있다고 하드라!! 장성 유적이 요수를 뚫고 고구려 땅으로 들어가더니만 그게 그거 아니겠어?? 

 

뭐 이런식의 논리로 기록이 나오게 된다. 

 

좌갈석, 우갈석 이렇게 나누면서..(원문은 생략한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그딴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르니까 갈석산과 진장성의 시작점에 대해서는 후대의 기록들끼리도 서로 안맞아서 오락가락하는데 오늘날 쌩뚱맞게 또 더 내륙의 보정시 일대를 본래의 낙랑군이나 갈석산과는 상관도 없던 곳에서 갈석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더 혼란스런 기록을 하나 추가해보자. 

 

사기 열전(몽염, 흉노)에서는 진시황이 장군 몽염을 보내 임조에서 요동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저들 논리라면 요동에도 갈석산이 있겠네?? 아니면 요동 역시 보정시 수성현이거나?

 

하나더.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요동군은 경사(낙양)에서 3600리거리, 낙랑군은 5000리라고 되어 있다. 이 거리감은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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